'이강백'의 <파수꾼>은 해설을 읽고 글을 읽을 때부터, '작품 감상의 길잡이'에 갇히게 된다.
"<파수꾼>은 바로 1970년대의 '체제 유지를 위한 안보 정책'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다."
이 한 줄의 해석으로 감상 비평의 틀이 잡히게 된다.
극의 첫 장면부터 눈에 띄는 것은 '해설자'의 존재이다. 이 '해설자'는 막의 중간에 등장하여 초승달을 걸거나 떼어내고, '운반인'이나 '촌장'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한 인물이 여러 배역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매우 매력적이면서도 한 가지 궁금한 점은, "과연 이 '해설자'도 극의 핵심적 비밀인 '이리떼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라는 것이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파수꾼이었습니다. 나의 늙으신 아버지께서도 어린 시절에 저 유명한 파수꾼의 이야기를 들어셨다 합니다. 물론 할아버지에게서 들으셨던 거죠...(하략)'
일단 이 첫머리의 대사로 보아 '해설자'도 잠재적으로 이리의 존재를 믿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마을 주민의 한 사람으로 극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단, '해설자'의 입장에서 객관성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파수꾼에 대한 의견을 배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앞에서도 잠깐 자품을 발췌해서 올렸지만, 망루 위의 파수꾼은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다는 것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망루 위의 파수꾼은 '해설자'의 아버지의 그 아버지 때부터 아니면 그 이전부터 있던 존재라 전해진다. 아무도 파수꾼 '가'에 대해서는 모른다. 단지 그가 망루 위로 다른 누군가가 올라오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 그리고 녹음기를 틀어 놓은 듯한 '이리 때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라는 외침을 한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이런 사람이 있을까? 그도 인간이라면 생리적 현상을 위해서라도 망루 아래로 내려옴직 하다. 하지만 작품 안에서 그러한 모습은 보여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파수꾼의 저녁 식사까지 밧줄로 올려 보내지니까. 이러한 장면은 나로 하여금 파수꾼 '가'가 실제 인물이 아닌, 다시 말해 이리 떼가 조작된 것처럼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허구적 존재일 것란 생각을 하게 된다. 쉽게 말해 사고가 많은 지역에 세워져 있는 교통 경찰 모양의 마네킨과 같은 존재 같다는 것이다.
그 외의 인물들, 파수꾼 '나'와 파수꾼 '다'에 대한 생각은 그리 많진 않았다. 어린 파수꾼이 이리 떼가 조작된 것임을 알아냈다는 점에서 파수꾼 '나'에 비해서 자각이 있는 인물로 보여지지만, 극의 나중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어떻게 보면 어린 파수꾼이 나이 든 파수꾼보다 더 우둔한 인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원래 알고도 못하는 것이 더 큰 바보라는 것이 나의 이론이니까. 촌장의 회유와 설득에 넘어가 '이리 떼'라 외치고 북을 치게 되는 것이 파수꾼 '나'이다. 자각조차 못하는 인물과 알고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는 두 인물은 나에게 있어 그저 우둔하고 답답한 인물들일 뿐이다.
이들 뿐만이 아니다. 극의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하는 '운반인'은 말 만들기 좋아하는 대중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이러한 부정적 캐릭터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의 역할은 크다고 생각된다. '운반인'이란 역할이 없다면 '파수꾼'들이 마을과 연결될 매개체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후에 촌장에게 배달될 편지 또한 있으나 마다 한 것이 될 테니까 말이다.
인물들에 대한 느낌을 열거하다보니, '이리 떼는 없고 흰 구름뿐'의 문제에 대한 언급은 못 한 것 같다.
왜 '촌장'은 혹은 그 '촌장'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는, 없는 '이리 떼'를 만들어 내야만 했을까?
작품 속에서 '이리 떼'를 알리는 북소리는 마을을 안정시키기보다 오히려 노인들을 지붕에서 떨어지게 하고, 우물에 아이들이 빠져 죽게 하고, 자신의 집에 불을 놓게 하는 등의 혼란을 야기 시킨다. 한편에선 이러한 '이리 떼'의 등장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운반인'과 같은 이도 생겨나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을 보았을 때 존재하지도 않는 '이리 떼'의 존재는 분명 부정적인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때로는 이리 떼도 필요하다.'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인간은 무언가 두려워 할 존재가 필요하다. 그것이 '신'이든지 '이리 떼'든지 간에 말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사람을 항상 긴장하게 하고, 준비하고, 대비하게 한다. 나는 이 점에서 이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나: ...(함께 걸어가며) 그런데 말입니다. 양철북을 치던 내 모습이 멋있지 않던가요?"
이것은 극의 마지막에 파수꾼 '나'가 '촌장'에게 한 말이다. 삶이란 생각하기 나름에 달린 것 같다. 이리 떼와 지배층인 촌장이 아무리 부정적인 존재라 하여도 이를 모르고 사는 서민들은 그 속에서 또 하나의 행복을 갖고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모든 것을 다 아는 이들 (파수꾼 '다'와 같은), 그들이 본다면 왜곡된 행복이라 생각할지라도 말이다.
이상 끝.
by. 팍샘.
[참고] : 네이버 검색 "이강백- 파수꾼"
「파수꾼」 1974년 8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이강백의 희곡.
1975년 3월 현대극회에 의해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우화적인 장치를 사용하여 제도적인 권력의 폭압성을 드러내는 이강백의 초기 작품세계를 잘 보여준다. 가상의 어느 마을에서 이리떼라고는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망루에 올라서 “이리떼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치는 파수꾼 ‘가’와, 그때마다 양철북을 두드리는 늙은 파수꾼 ‘나’의 아이러니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자원한 소년 파수꾼 ‘다’에 의하여 이리떼는 없고 아름다운 흰구름뿐이라는 진실이 밝혀지지만, 이마저도 마을의 질서유지를 위해서는 가상의 적인 이리떼를 설정해 놓아야만 한다는 촌장의 설득에 파묻혀 버리고, 결국 파수꾼 ‘다’도 열심히 양철북을 두드리게 된다.
이렇듯 이 작품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체제유지를 위한 안보논리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보여준다. 이러한 풍자가 우화적인 장치를 통해서 빗대어 표현되고 있는 것이 이강백 초기 희곡의 특징인데, 「파수꾼」은 이러한 면모가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화적인 장치가 두드러진 만큼 극적인 갈등의 축이 미약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어 연극적 효과는 다소 약화되는 약점을 아울러 지니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