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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 희곡 <호신술> - 감상 비평문

by 팍샘 2024.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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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의 희곡 - <호신술> 간단 소개

1931년 9월부터 1932년 1월까지 『시대공론』에 발표한 송영의 희곡. 이 작품의 형식은 단막극이며 반민족적 자본가를 풍자한 일종의 촌극이다. 이 작품에서 풍자의 대상은 김상룡이라는 악덕자본가이다. 그는 직조공장을 비롯해 여러 공장을 지니고 있는데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비한 방책을 생각하다가 호신술을 배우기로 한다. 전 가족을 설득하여 호신술을 배우려하지만 거듭되는 낭패를 겪게 된다. 그 과정은, 호신술을 배우는 식의 발상으로는 당대 노동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음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그는, 파업노동자들이 집으로 몰려오자 겁에 질려 허둥거리게 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일제치하의 구조적 모순에 안주하고 있는 자본가들의 속성을 비판하면서,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이 반민족적 자본가를 압도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하려 하였다. 이 작품에서 가장 특기할 사항은 노동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노동자들이 무대상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동자들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효과를 올리기 위해, 작가는 작품의 갈등구조를 약화시킨 대신 김상룡을 위시한 부정적 인물들이 스스로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어 관객의 조롱거리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극의 말미에 노동자들의 공격적인 함성을 삽입하여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관객들이 마음껏 상상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1920년대 대부분의 노동극이 노동자들의 어려운 노동환경과 그 속에서의 고통을 직접 보여주었기 때문에 검열에 번번이 걸려 공연이 무산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호신술」에 나타난 이러한 실험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이러한 변모는 1930년대의 달라진 공연환경, 즉 강화된 검열과 이에 맞서는 카프의 연극대중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감당해 나가려 하였던 실천적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호신술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감상비평]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인물들이 '호신술'을 배우는 장면이었다. 이것은 <호신술>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오합지졸' 그 자체. 

한편, 작품 곳곳에 드러난 인물들의 대사와 딸 '혜숙'이 알려주는 '창가'의 내용은 이 작품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혼재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따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호신술의 사전적 정의]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위해를 가함으로써 호신하는 기술이 아니고, 상대방의 공격을 미연에 봉쇄하고 제어하는 수세의 기술이다.

 

'호신술'의 사전상 정의를 참고해 보자. '상대방의 공격을 미연에 봉쇄한다.'라는 것에 눈길이 간다. 작품 초반에 '상룡'은 아버지 '정수'와의 대화에서 노동자들의 대모에 대비하기 위해 체면과 명예도 버리고 '호신술'을 배운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둘의 대화에서 '법' 또한, '상룡'에게는 방패막이 되지 못한 것으로, '호신술'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으로 이야기된다. 

'호신술'의 의미. '상룡'이 만약 공격을 미연에 봉쇄하고 싶다면, '호신술' 자체의 의미로 보았을 때 노동자들 간의 타협이 가장 적절한 '호신술'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한편, 역할을 거꾸로 놓고 노동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타협이 되지 않는 고용주인 '상룡'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존재이며, 그에 대한 '호신술'로 '파업'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사실, 작품 안에서는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구체적 갈등관계나(실제로도 노동자의 모습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고 단지 마지막에 함성만 들을 수 있었다.) 노동자들이 어떻게 일하는 지에 대한 장면이나 언급이 없어, 그 부분에 관해서만은 전적인 나의 상상력이 필요했다. 표면적인 내용으로는 '상룡'의 가족과 변호사, 의사들은 부와 명예를 지닌 부정적 인물로 풍자의 대상임이 분명했고, 반면 바보 같은 '춘보'와 더불어 하인들, 넓게는 노동자들까지가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상황을 액면 그대로 보기엔 뭔가가 부족한듯 싶었다. 여기서 나는 나 자신이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지닌 '자본주의'란 것에 전적으로 사회화된 인물임을 밝혀야 할 것 같다. 변호사와 의사의 대사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변호사 : ..아마 가정해서 이 세상이 사회주의의 사회로 개혁이 된다고 하면 아마 그때는 모두 게을러져서 사회는 담박 영락이 될걸요. 그렇지 않습니까?

의사 : 첫째 자유와 경쟁이 없을 테니까요.

 

나는 이 둘의 대화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둘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둘의 대화에 공감한다는 것일 뿐. 

때문에 사실 나는 '상룡'과 같은 고용주나 변호사, 의사와 같은 사회적 강자, '춘보'와 같은 하인들이나 '노동자'들의 어느 한쪽에 기울기보다 양편 모두 그리 달가운 표정으로 대하진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이 양쪽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그 이해의 폭이 좁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나도 양 편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정작 본인들이야 '대화' 정도로 그 타협이 가능하겠는가.

 

이 작품은 노동문제를 이야기 하면서도 '노동자'들은 한 번도 등장시키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에 함성이란 목소리만 들려줄 뿐이었다. 그야말로 '희곡'으로서의 여백을 잘 살린 것이다. 이러한 '희곡'의 여백은 내 상상력으로 채워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by.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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