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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 희곡 '난파' - 감상 비평문

by 팍샘 2024.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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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 희곡  <난파> 간단한 소개.

김우진()이 쓴 표현파 희곡. 1926년에 완성된 작품이며, 그의 5편의 희곡 중 하나로, 자전적()인 내용이다. 겉표지에 ‘3막으로 된 표현주의극’이라고 독일어로 쓴 것처럼 표현파 희곡에 속하는 작품으로, 복잡하게 얽힌 유교식 가족구조 속에서, 진보적 서구사상을 지닌 한 젊은 지성인인 시인의 정신적 몰락과정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표현파극이 대체로 그러하듯 이 작품도 줄거리가 선명하지 못하다. 어스름한 달밤의 커다란 구식집 앞마당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제1막에는 젊은 시인(주인공)·모()·악귀·신주·제1계모 등이 나오는데, 시인이 계모와 다투는 것이 주 내용이다. 왜 이러한 나라, 이러한 집안에 자기를 태어나게 하였느냐는 젊은 시인의 항의가 대단하다. 그렇게 되자 비비(버너드 쇼의 작품 속의 주인공과 )가 시인에게 가족과 이별하도록 권고하는 것이 제2막의 내용이다. 그러나 제3막에 가면 가족이 시인과 그를 사랑하는 비비를 떼어놓으려 한다.

그런데 우유부단한 시인은 가족과의 결별을 계속 권하는 비비의 충고마저 받아들이지 못하고 삶의 돌파구를 찾아 방황하다가, 끝내 파고가 높은 절망의 바다에서 난파당하여 익사하고 만다.

이처럼 작가의 진보적 사상과 전형적 봉건가정은 궁극적으로 타협할 수 없었고, 결국 주인공의 파멸로 끝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전통윤리와 서양적 근대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자살로 끝맺은 김우진 자신의 삶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이 희곡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실험극으로서, 표현파답게 상징적임은 물론이고 구성도 일관성이 없으며 인물들도 무질서하다. 그만큼 <난파>는 당시로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선 실험극으로서,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이라는 기록을 남긴 작품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난파 [難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감상비평문>

"인생은 난파다. 죽음이라는 예고가 있는 난파."

 

'김우진'의 <난파>를 읽고 난 후의 내 생각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난파>를 2번이나 정독한 후에서야 떠오른 생각이라 할 수 있겠다. 컴컴한 내 방에서 스탠드 불빛만 남겨 놓고 <난파>를 열린 가슴으로 맞이 했으나, 그 열린 가슴으로 들어 온 <난파>는 '이게 뭐야.'라는 외마디 비명만을 남겼다. 책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나의 읽기가 부족한 것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그야말로 난파된 배의 조각들이 떠다니듯 희곡 속의 이미지들이 조각조각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오로지 드는 생각은 '어머니'와 '비비', 그리고 '카로노메'. 그 세 사람이 한 사람 같다는 것.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지만 <난파> 속에서 '우주만물, 인간, 역사' 이 모든 것을 보았다. 사실 너무 복잡하고, 설명 불가능한 것들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는 느낌이 강해서, '뭔가 한두 가지는 빼도 좋았을 것을..'하는 생각도 했다. '시인' 자신의 내면 갈등만 표현해도 어려웠을 것인데, 신라시대를 아우르며 '효'를 내세우는 도덕 윤리, 여러 계모들의 등장, 또 한편으로는 '시인'의 역할이 먼저인가 '아들, 손자'의 역할이 먼저인가 하는 사회적 지위의 갈등까지 아우르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머리를 부여잡게 하였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다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그 존재에게 압박을 가하는 요소로 사회적 신분체제를 제시한 것으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난파>를 두 번째 읽을 때, 처음에 간과했던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제1막에서 '시인'이 발가벗고 창백한 몸으로 등장한 것. 그리고 막이 끝날 무렵 어머니 품에 안기는 발가벗은 시인의 모습. 처음과 끝에만 옷을 벗었나? 아니, 어쩌면 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상태로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모습에서 떠오른 이미지는 '빨간 태아.' 애초에 아무 것도 없는 인간. 어디선가,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태어날 때의 충격으로 망각이 시작된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어쩌면 시인은 이 태아와 같은 존재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어쩌면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사색을 하며,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태아가 아닐까.

다음으로 드는 생각은 '어머니, 비비, 카로노메'가 하나의 이미지로 들어 왔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백의녀'와 '비의녀' 모든 여성 등장 인물들을 통틀어 하나의 여성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백의녀'의 순결함 혹은 '미의녀'의 요부성,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어머니의 이미지까지...

 

희곡은 마치 어려운 '시'와 같아서 대사에 등장하는 작은 단어 하나에까지 내포된 의미가 있는 것만 같다. '금잔술'과 '불 안 켜진 등대' 등이 그것이다.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글일수록 처음에는 어렵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데는 나만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그 감상이 길어져 버린다.

이 희곡은.

인생은 죽음이 예고된 난파와 같은 것. 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글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던 시대에 '시인'이란 최고의 학자를 말하는 것이었고, '시는 인생이다.'라는 말도 있으니, 그 인생을 다루는 '시인'이라 함은 모든 것을 아는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기에 불완전한 존재일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았을 때 주인공을 '시인'으로 잡은 것은 이러한 것들을 상징하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모두 '시인'이다. 최소한 자기 인생하나만큼은 쓸 수 있는 시인. 이렇게 '인생은 죽음이란 예고된 난파를 즐겁게 혹은 괴롭게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by.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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